까르마 이론과 유전자 결정론은 각각 동양과 서양에서 인간의 행동과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원리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이 글에서는 까르마와 유전자 이론을 철학적으로 비교하고, 인간 자유의지와 자아 정체성, 사회적 책임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인간 존재를 규정하는 두 패러다임
인간은 왜 특정한 성향, 습관, 행동 양식을 보이는가? 동양 철학과 서양 과학은 이에 대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까르마(karma)’는 의도된 행위가 남긴 흔적으로, 삶의 전개에 영향을 주는 원리입니다. 반면 유전자 이론은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이 DNA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며, 성격과 질병, 심지어 성향까지도 유전적 기제로 설명합니다.
이 두 관점은 인간의 행동이 과거의 흔적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그 철학적 기반과 실천적 의미는 크게 다릅니다. 까르마는 윤회와 해탈이라는 초월적 목표를 지향하며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 반면, 유전자 이론은 과학적 사실에 근거해 인간을 생물학적 존재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까르마와 유전자
1. 까르마: 의식의 흔적
불교에서 까르마는 단지 외적 행위가 아니라, 행위 뒤에 깔린 의도(찬다)를 중요시합니다. 즉, 까르마는 정신적 행위와도 밀접하게 연결되며, 이 까르마가 저장되는 곳이 바로 아뢰야식(아라야식)입니다. 아뢰야식은 개인의 무의식적 저장고로, 과거 생에서 쌓인 행위의 흔적이 현재 삶의 조건으로 작용한다고 설명됩니다.
까르마는 결정론적 측면을 가지지만, 동시에 변화 가능한 구조입니다. 불교는 ‘현재의 의식적 선택’으로 과거의 까르마를 정화하고 새로운 까르마를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이 점에서 까르마는 ‘결정되었으되 바뀔 수 있는’ 열린 구조로 이해됩니다.
2. 유전자: 생물학적 코드
유전자는 생명체의 특성을 결정짓는 생물학적 설계도입니다. 특정 유전자는 질병 감수성, 성격, 심리적 경향에 영향을 줍니다. 예를 들어 MAOA 유전자 변이는 충동성과 공격성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되며, ‘전사 유전자(warrior gene)’라는 별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MAOA 에 변이가 생기면 도파민이 분해되지 않고 뇌에 쌓이게 되는데 이 경우 사람은 자제력을 잃고 극도의 쾌감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폭력성과 공격성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21세기 이후 유전학은 유전자의 결정성에 균열을 내고 있습니다. 후생유전학(epigenetics)은 환경과 경험이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밝혔으며, 동일한 유전자라도 삶의 조건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발현될 수 있다는 점이 밝혀졌습니다. 이는 까르마의 인연론처럼 유전자 역시 고정된 운명이 아니라 조건과 맥락에 따라 변화하는 잠재력이라는 가능성을 내포하게 됩니다.
철학적 비교 ( 자아, 자유, 책임 )
1. 자아 개념의 차이
까르마는 고정된 자아를 인정하지 않으며, 업의 흐름이 의식의 연속성을 만든다고 봅니다. 반면 유전학은 개인을 생물학적 단위로 파악하며, 유전자의 조합에 따라 독립된 개인이 형성된다고 전제합니다. 불교적 관점은 자아의 해체를 통해 해탈을 추구하지만, 유전학은 자아를 과학적으로 구성하려는 시도에 가깝습니다.
2. 자유의지에 대한 접근
까르마는 인간이 과거의 행위로부터 영향을 받지만, 현재의 선택으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의지를 인정합니다. 수행과 명상은 이 자유의지를 강화하는 훈련입니다. 유전자 이론은 한때 결정론적으로 간주되었으나, 후생유전학과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의 발견은 환경과 교육이 개인의 특성을 바꿀 수 있음을 시사하며, 제한적이나마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3. 윤리적 책임
까르마는 개인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중시합니다. 악업은 고통을 낳고, 선업은 해탈의 길을 연다고 믿습니다. 유전학은 생물학적 원인을 강조하는 이유로 현상적 책임을 생물학적으로 환원할 위험이 있습니다. 예컨대, 범죄자의 행동을 유전적 결함으로 설명하는 것은 책임을 흐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생명윤리는 유전적 정보의 사용과 해석에 있어 사회적 책임과 맥락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까르마와 유전학, 인간 이해의 두 축
까르마와 유전자 이론은 각각 동양의 철학과 서양의 과학이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전자는 의식과 도덕, 수행을 중심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후자는 물질과 생물학, 환경의 상호작용으로 인간을 규명합니다. 이 둘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상보적인 관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까르마는 우리의 선택과 의식의 방향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주며, 유전학은 생물학적 한계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극복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합니다. 이 두 관점의 통합적 접근은 인간 존재의 복합성과 변화를 더 풍부하게 이해하게 해 줍니다.
우리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가능성과 선택의 산물입니다. 까르마와 유전자는 각각 그 가능성과 조건의 지도를 제시합니다. 이 두 지도를 함께 펼쳐볼 때, 인간은 운명과 자유의 중간 지점에서 보다 자율적이고 윤리적인 존재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